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문단 편집) === 외교활동 === 이후 피렌체 공화국은 온건중도파인 피에로 소데리니를 지도자로 내세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29살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장에 발탁된다. 공식적인 직함은 '10인 전쟁위원회의 비서관'으로, 임무는 공화국의 군대를 감독하는 기관의 통신문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키아벨리는 중요한 정책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정책을 집행하고 상관을 보좌하는 과정에 있어서 정보를 취합하고 요약하여 전달하면서 공화국의 외교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여러 대사들이 급하게 보내온 공문서들을 처리하면서도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항상 노력했기 때문에, 상관들은 그가 보낸 공문서를 높게 평가했고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의 일을 즐겼다. 1499년 마키아벨리는 [[피사 공화국|피사]] 재정복 작전에 가담한 용병대장 야코포의 주둔지로 파견되었다. 야코포는 피옴비노의 영주이기도 했는데, 그는 피렌체 정부로부터 자금과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지 못하면 작전에서 이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키아벨리는 야코포를 잘 설득해 애초 합의된 조건을 따르도록 했지만, 한 나라가 용병들에 의존하는 근시안적 방침을 따르게 되면 그 나라는 결국 위험해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피렌체의 북동부에 위치한 소국 포를리로 가서, 그곳의 여군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만났다. 마키아벨리는 그녀가 피렌체에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랬고 그녀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녀는 피렌체의 적대국인 밀라노에 힘을 보태주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카테리나는 "피렌체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만족스럽지만 행동은 항상 실망스러웠다"고 변명했다. 이 사건은 마키아벨리에게 참을 수 없는 조롱으로 느껴졌고, 심한 굴욕감을 심어줬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느끼게 되는 피렌체의 현실적 무능력은, 훗날 《군주론》이 자라나는 씨앗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